삶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게 내 모습이었다. 어딘가로 끌려간다는 생각을 늘 하며 그 불안함을 안고 잠들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에서도 주님은 신실하시고 아름다우셔서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의 길로 쳐서 이끌어 내시고 도와주신다.
상처 속에서 방황하고 이리저리 아파할 때마다 주님은 나타나셨고 얘기하셨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내 인생이 전부였고 내 끝을 내가 정했기 때문에 힘들면 죽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만 했다. 이 블로그에 적었던 모든 얘기들은 계속 반복되어가고 있다. 게임에 빠지고 때로는 외로움에 누군가와 험담을 하고 슬픔을 나누고. 그러나 그 주체에 하나님이 없는 삶은 그저 허무함과 괴로움만 남아서 보이지도 않는 빛나는 꿈을 잠시 꾸면 순간은 젖어있어도 나는 더욱더 비참해지는 것이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진짜 삶이란 무엇인가.
친구를 보면, 또 동생들을 보면 그들이 의지하는 게 무엇인지 보인다. 막내는 꿈을 좇으려 하지만 현실에 괴로워하고, 친구는 결혼을 동경하지만 사랑의 여러 이름 중 인내를 배우지 못해 도망을 치며, 게임에 빠져 인생의 즐거움만 바라보려는 주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내가 있다.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지만 행복하다면 그 조건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달려야 하고 뛰어야 하는 걸까. 성공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지만 때로는 그 한계의 폭이 너무 높거나 내가 쉼 없이 달려야 하는 것이어서 끈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의 한계는 (아는 만큼 할 수 있으니까) 사람마다 달라 적고 큰데, 티브이에서 나오는 성공의 기준은 돈을 중심으로 돌아서 (때로는 노력하기도 전에) 그 벽에 부딪혀 우리의 삶이 괴로워지기도 한다.
그럼 하나님께 요구해야 하는 걸까? 나 같이 신앙의 흔들림이 크고 자주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천국에 있는 사람들 같이 신앙심이 좋고 상냥한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하는 걸까? 사실 최근까지도 그 괴로움에 속으로 울고 있었다. 아니, 폭포처럼 눈물을 쏟았다. 하나님 보고 나를 데려가달라고. 내 신앙이 조금만이라도 나아지는 수준이 된다면 나 그때 바로 죽여달라고.. 그렇지만 하나님은 나를 이곳에 두시고 여전히 악한 일들이 판치는 곳, 직장. 가족. 그리고 혼자 남아있을 때 고통 속에서 두고 지켜보셨다.
나는 두려웠다. 천국을 못 가게 되면 어쩌지 싶었다. 천국의 확신보다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느낌이라는 게 들었다 빠져나갔다 하고 어느 때엔 알았다가 알지 못하기도 했으니까. 무당이 말하는 속된 말로는 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울처럼 불안 속에서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다 알지 못해도, 다 믿지 못해도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고 늘 옳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과 평안만 남는다.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하고 걸어가는 삶은 슬픔 속에서도 기쁨만 남는다. 그곳이 똥통이어도. 베드로처럼 사형 전날에도 감옥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내가 되기를. 그렇게 전부 주님께 맡기는 내가 될 수 있기를. 나는 죽고 내 자리에 예수님만 계시기를 오늘도 기도한다.